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라라 슈만 (문단 편집) === 남편 사후 === 하지만 남편 로베르트 슈만이 1854년 2월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서 자살을 시도했으며,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1856년 사망할 때까지 정신병원에 있어야 했다. 그녀는 가장 역할을 할 수 없는 남편을 보살피는 한편 아직 어린 7남매를 길러야 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남편이 쓰러진 이후에는 더 이상 작곡활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 연주활동은 상당히 활발히 했는데, 죽기 5년전인 1891년까지 유럽 각지에서 연주회를 개최했으며 1874년에는 미국에서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클라라는 연주회 횟수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1830년부터 계산하면 무려 1300회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남편의 피아노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초연을 했으며 남편이 사망한 후부터는 전술한 요아힘과 함께 자주 콘서트 투어를 다녔는데, 특히 요아힘과는 240회에 달하는 콘서트 횟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의 작품을 비롯해서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고전파 작곡가들과 슈베르트, 멘델스존, 쇼팽 등 낭만파 초기 거장들의 작품을 주로 연주하였으며 제자이자 친구였던 [[요하네스 브람스]]의 작품도 자주 연주하였다.[* 클라라가 생애 마지막 연주회에서 연주한 곡도 브람스의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원래 관현악곡인데 2대의 피아노용으로 편곡)이었다.] 반면 [[프란츠 리스트]] 등의 작품은 자신과 음악적 경향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주하지 않았다. 1875년경 클라라는 오른팔에 신경통 증상이 생겨서 약 2년정도 연주활동을 쉬어야 했다. 한동안은 글씨도 쓰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는데, 이후에도 이 증상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고 평생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77년 베를린 복귀연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에도 왕성한 연주활동을 했다. 1878년에는 프랑크푸르트의 호흐 콘세르바토리(Hoch Conservatory)의 교수로 부임했으며 1892년 은퇴할 때까지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뛰어난 음악 교육자로도 명성을 날렸다. 교수가 된 이후 그녀는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해서 여생을 보냈다. 한편 브람스와의 관계도 상당히 많이 알려져 있다. 로베르트 슈만이 정신병 증세로 자살하려고 투신했을 때 슈만 부부를 적극적으로 도운 것이 바로 브람스였다. 특히 클라라는 이 때 막내 펠릭스를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는데, 브람스가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는 클라라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덕분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이후 두 사람은 평생지기가 되었다. 브람스는 계속 클라라와 슈만의 아이들을 도와주면서 그녀에 대한 감정을 키워갔으며 이러한 그의 감정은 당시에 작곡된 작품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클라라는 14세 연하의 브람스와 친분은 소중히 여기면서도 연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1896년 클라라는 프랑크푸르트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향년 77세. 남편이 죽은지 40년만의 일이었다. 그녀의 유해는 본(Bohn)의 알터 프라이도프(Alter Friedhof) 묘지에 묻혀 있는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클라라를 연모했던 브람스는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 클라라가 죽은 다음 해 생을 마감하였다. [[파일:external/welltempered.files.wordpress.com/schumannclara.jpg|w=370]] (말년의 모습)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